1987년 첫 개최 이후 스즈카는 수많은 명승부와 챔피언십 결정의 순간을 만들어온 트랙이다. 8자 형태의 독특한 레이아웃 속에서 S코너, 데그너, 130R, 그리고 최종 시케인까지 이어지는 구성은 드라이버의 정밀함과 담력을 동시에 요구하며, 작은 실수 하나로도 레이스 흐름이 바뀌는 까다로운 서킷으로 꼽힌다.
스즈카 그랑프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궁금하다면 ▼
2026 F1 일본 스즈카 그랑프리 프리뷰: 경기 일정, 서킷 특징, 관전 가이드
일본 스즈카 서킷은 이제 안타깝게도 시트를 잃은 유키짱의 홈 그랑프리인 동시에 2025년까지 혼다 엔진을 공급받았던 레드불과의 인연이 깊은 서킷이었다. 올해부터는 유키도 없구.. 엔진도 포
f1-duck.com
현재는 일정이 4월, 시즌 3~4라운드로서 시즌 초반 흐름을 가늠하는 레이스이지만, 2023년 이전의 스즈카 레이스는 주로 시즌 14~16라운드, 즉 마지막 2~3경기 중 하나로 배치되며 수많은 챔피언십을 결정지었던 무대였다. 챔피언십의 향방이 걸린 순간마다 드라이버들은 이곳에서 라이벌 구도를 불태웠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대를 대표하는 장면들이 쌓여왔다. 특히 Ayrton Senna와 Alain Prost가 만들어낸 긴장감 넘치는 대결은 여전히 스즈카를 상징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고, 최근까지는 Max Verstappen이 이 트랙에서 또 다른 시대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스즈카의 수많은 순간들 중에서도 특히나 인상적인 레이스들을 하나씩 짚어본다.
1988 세나, 스타트 8위에서 1위로 올라서며 첫 월드 챔피언십을 확정하다
1988년은 맥라렌-혼다가 14번의 레이스 중 13승을 거두며 사실상 경쟁 구도를 지워버린 시즌이었다. Ayrton Senna와 Alain Prost는 스즈카에서도 그리드의 Front Row를 나란히 차지했다.
레이스 당일, 흐린 하늘 아래 12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타트 신호가 주어졌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폴 포지션의 세나와 Satoru Nakajima가 동시에 스톨을 일으킨 것이다. 스즈카의 내리막 스타트 구간 덕분에 두 드라이버 모두 다시 시동을 걸 수 있었지만, 이미 다른 드라이버들은 그들을 남겨두고 달려가고 있었다.
세나는 첫 랩을 8위로 마쳤다. 그러나 이후 페이스는 완전히 달라졌다. 코너마다 과감한 진입과 안정적인 엑시트를 반복하며 빠르게 순위를 끌어올린 세나는 20랩 무렵에는 이미 2위까지 올라서며 선두 Alain Prost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흐름은 더욱 미묘해졌다. 백마커들(1랩이 뒤처진 후발주자들)이 애매한 위치에 뭉쳐있는 탓에 선두인 프로스트는 이 구간에서 시간을 잃기 시작했다. 28랩, 메인 그랜드스탠드 앞에서 세나는 마침내 프로스트와 나란히 서더니, 1코너에서 과감하게 안쪽을 파고들며 선두를 가져왔다.
이후 세나는 완전히 레이스를 장악하며 약 13초 차이로 우승을 거두었고, 데뷔 5년 만에 첫 월드 챔피언십을 확정지었다. (이게 시작일 뿐임을 그는 알았을까) 경기 후 패독에서 혼다 창립자 Soichiro Honda와 함께한 장면은 지금까지도 스즈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94 폭우 속에서 끌어낸 Damon Hill의 집념
1994년 일본 그랑프리는 시작부터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폭우로 인해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시작된 경기는 스타트부터 물보라가 몰아쳤다. 선두 Michael Schumacher의 뒤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준의 스프레이가 발생했고, 연달아 사고가 이어졌다.
Johnny Herbert, Ukyo Katayama, Taki Inoue가 연이어 벽으로 밀려났고, 리스타트 이후에도 사고는 계속됐다. 결정적인 장면은 Martin Brundle의 아쿠아플레이닝(Aqua Planing)이었다. 그의 차량이 컨트롤을 잃고 트랙 마샬(Marshall) 인원과 충돌하며 레이스는 레드 플래그로 중단됐다.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레이스는 합산 기록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즉, 중단 이전의 레이스 시간과 이후 레이스 시간을 합쳐 최종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Damon Hill은 슈마허를 상대로 6.9초의 격차를 뒤집어야 했다. 슈마허는 2스탑 전략을 선택했고, 힐은 1 스탑으로 대응했다. 문제는 힐의 피트스탑에서 발생했다. 오른쪽 리어 타이어 교체가 지연되며 시간손실을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의 레이스 페이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슈마허가 두 번째 피트스탑 이후 새로운 타이어로 추격해오자, 그는 매 랩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며 격차를 유지했다. 마지막 랩, 그는 모든 판단이 의식에 앞서 이루어지는 상태의 '본능'에 가까운 드라이빙으로 레이스를 완주했다. 당시본인이 차를 컨트롤하는 상태가 아니라, 거의 외부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상태에 가까웠다는 표현을 남기며, 3.3초 차 승리를 이룬 힐은 이 레이스를 통해 챔피언십을 단 1점 차로 좁힐 수 있었다.

2002 ‘타쿠마!!' 시즌 내내 고전한 끝에 이루어낸 그의 눈물겨운 홈그랑프리 P5
2002년 스즈카의 주인공은 단연 Takuma Sato였다. 당시 포인트는 상위 6명에게만 주어졌고, 페라리·윌리엄즈·맥라렌은 시즌 내내 이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사토가 속한 조던 역시 그 경계 바깥에 있었다. 시즌 내내 그는 경험 부족과 실수로 기복 있는 모습을 보였고, 팀 내에서도 확실한 신뢰를 확보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레이스인 스즈카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는 예선에서 팀메이트 Giancarlo Fisichella를 앞서며 7번 그리드를 확보했다. 그에게 실질적으로 팀이 기대한 건 안전한 완주였을거다.
레이스 초반, 상위권은 예상대로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했다. 그러나 중위권에서는 끊임없는 접전이 이어졌고, 사토는 그 속에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페이스를 유지했다. 경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혼다 엔진을 사용하는 다른 차량들이 잇따라 리타이어했고, 사토는 점점 더 중요한 위치로 올라섰다. 르노와의 접전 속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33랩에 6위로 올라서며 포인트권에 진입했다. 팀에서는 무전을 통해 “지금 위치를 유지하라, 무리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했다.
49랩, Ralf Schumacher의 리타이어로 5위로 승격된 사토는 이후 남은 랩 동안 르노의 추격을 안정적으로 방어하며 그 자리를 지켜냈다. 체커기를 통과하는 순간, 관중석에서는 ‘타쿠마’라는 이름이 폭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누가 홈 그랑프리 아니랄까봐)
경기 후 P1 Michael Schumacher가 “오늘의 승자는 둘”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레이스의 결말은 일본인들과 스즈카 트랙에서 순위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2005 키미 라이코넨, 마지막 랩의 기적같은 추월
2005년 스즈카는 예선부터 혼란스러웠다. 비로 인해 타이밍이 엇갈리며 Kimi Räikkönen, Fernando Alonso, Michael Schumacher 등 당대의 챔피언십 우승권 선수들이 모두 후미에서 레이스를 스타트하게 된 것이었다.
라이코넨은 17번 그리드에서 출발했다. 첫 랩에서의 실수로 시케인을 직선으로 통과하며 더 뒤처졌지만, 이후 그의 페이스는 압도적이었다. 긴 스틴트를 활용한 전략 속에서 그는 점차 선두권으로 접근했고, Michael Schumacher를 포함한 여러 경쟁자들을 추월하며 흐름을 바꿔갔다.
레이스 후반, 선두 Giancarlo Fisichella와의 격차는 약 5초, 남은 랩은 8랩이었다. 매 랩마다 꾸준히 간격을 줄인 라이코넨은 마지막 랩에서!! 단 한 번의 기회로 추월을 만들어냈다. 전 코너에서 더 좋은 엑시트를 만들어낸 그는 코너 바깥 라인에서 고속으로 나란히 진입하며 마지막 순간의 추월에 성공했다.
특히 추월이 쉽지 않은 트랙이기에, 이 장면은 스즈카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상징적인 오버테이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2011 Jenson Button의 똑똑하고 흔들림 없는 레이스 운영력을 보여준 스즈카 GP
2011년 Japanese Grand Prix 당시 Sebastian Vettel은 단 1점이면 타이틀을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그 목표를 무난하게 달성했다. 그러나 그날 레이스에서 돋보였던 우승자는 Jenson Button이었다.
스타트 직후, 폴 포지션의 베텔은 1코너 진입에서 라인을 넓게 가져가며 버튼을 바깥쪽으로 밀어내었다. 접촉 직전까지 갔던 이 장면은 경기 초반의 긴장감을 끌어올렸지만, 버튼은 페이스를 잃지 않고 그대로 레이스에 집중했다.
초반 스틴트에서 베텔이 선두를 유지하는 동안, 버튼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타이어를 아꼈다. 첫 번째 피트스탑 사이클에서 그는 이른 피트인 대신 트랙에 더 오래 남는 오버컷을 선택했고, 이 결정이 흐름을 바꿨다.
베텔과 Fernando Alonso가 피트인한 사이 인랩에서 1초 이상 빠른 랩을 기록하며 포지션 변화를 만들어낸 버튼은 선두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레이스 후반, 알론소가 1초 이내로 접근하며 압박을 가했지만 버튼은 흔들리지 않았다. 몇 랩 동안 간격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랩타임을 끌어올리며 다시 여유를 확보했다. 마지막까지 완전히 통제된 상태에서 레이스를 마무리하며 그는 스즈카에서의 우승을 가져갔다.
이 레이스는 버튼이라는 드라이버의 특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공격적인 한 방보다는, 상황을 읽고 레이스를 ‘설계’하는 그의 능력은 스즈카라는 까다로운 트랙 위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2025 Verstappen, 스즈카 4연승!!!
최근 스즈카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2022-2025 스즈카 4연승의 주인공 Max Verstappen을 빼놓기는 어렵다.
특히 2025년 레드불은 시즌 초반부터 레이스카 밸런스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세팅 역시 매우 좁은 범위에서만 성능이 발휘되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스타펜은 예선에서 완벽한 랩을 만들어내며 폴 포지션을 확보했다. 스즈카에서는 이 한 번의 랩이 레이스 전체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본 레이스에서도 그는 흔들림 없이 레이스를 운영했다. 스타트 이후 선두를 지켜낸 그는 Lando Norris와 Oscar Piastri의 압박 속에서도 실수 없이 페이스를 유지했고, 전략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선택을 이어나갔다. 특히 그는 Fastest Lap을 계속해서 찍기보다, 필요한 만큼만 빠르게 달리며 레이스를 통제했다. 상대가 가까워질 때만 속도를 끌어올려 다시 간격을 벌리는 방식으로 전체 흐름을 관리했다.
결국 막스 베르스타펜은 스즈카 4연승의 기록을 이루어냈다. 완벽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최적의 결과를 끌어내는 능력, 그리고 기회를 확실한 결과로 연결하는 집중력이 어떻게 현대 F1에서 승리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레드불의 그... 막스의 레이스였다.

스즈카의 레이스는 추월이 어려운 트랙 특성으로 인해 단 한 번의 스타트 실수도 용납되지 않지만,
그만큼이나 기대치 못한 오버테이크가 극적으로 일어났을 때에 또 보는 재미가 두 배인 레이스인 것이다.
올해의 레이스도 한가득 기대하며 다음주를 기다리는 중이다.
'2026 시즌 & 레이스 > 레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 F1 중국 상하이 그랑프리 Post-race 리뷰 (1) | 2026.03.17 |
|---|---|
| F1 상하이 그랑프리의 4가지 역대급 레이스 (0) | 2026.03.13 |
| 2026 F1 호주 그랑프리 Post-race 리뷰 (2) 팀별 심층 리뷰 (페라리의 선택을 이해해보자...) (0) | 2026.03.09 |
| 2026 F1 호주 그랑프리 Post-race 리뷰 (1) 결과 및 관전 기록 (0) | 2026.03.08 |